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어떤 언어를 들으면 머릿속에서는 그와 관련된 이미지가 활성화된다. 자연사, 안락사, 입양이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적어도 고통의 이미지는 아닐 것이다. 언어가 누락한 현실을 발견하고 이미지가 조장한 허상을 거부하는 일은 중요하다. 어떤 자연사는 가장 비참한 죽음이라는 것을, 어떤 안락사는 고통사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을, 어떤 입양은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라는 것을, 언어들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 대신 저 언어들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을 은폐한다. 그래서 모든 보호소가 인도적인 장소라고, 모든 유기동물이 마지막 순간만큼은 편안하다고 믿게 만든다. 언어와 현실이 동떨어져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할까. 언어? 아니면 현실?


🔖 모든 타자가 내게 특별해진 존재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 깨달음과 일치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감상주의를 넘어서야 했고 내 안의 도덕적 한계를 재설정해야 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튀어나오는 자기모순을 당혹감에 휩싸여 응시해야 했다.

동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사람은 이 모순에 대해 공격적인 질문을 받는다. “개, 고양이를 먹지 말자고? 소, 돼지, 닭은?” “모피를 입지 말자고? 가죽 신발과 가죽 가방은?”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화장품을 쓰자고? 동물실험을 한 의약품은?” 그리고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나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중요한 선택을 한 사람들, 생명윤리에 있어 엄격한 생활을 하는 실천주의자들(나는 아니다)은 극단적인 동물 애호가라는 조롱을 당한다.

동물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삶의 방식을 재고하기보단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모순을 찾아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싶어한다. 동물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평범했던 일상이 딜레마로 전환되는 일이다. 나를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외부의 적이 아닌 스스로의 모순과 싸우는 일이다.


🔖 어느 나라도 축산물로 지정한 적 없는 종을 우리나라 축산업에 추가하고, 나아가 동물복지까지 개선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 게다가 190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새로운 동물을 주된 축산 종에 포함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이 비용은 산출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법화를 해서 기준에 맞는 축종과 사육과 도살 방식을 연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시설 마련을 한다면 그에 따른 비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 개농장 주인들이 할 리는 없다. 결국 개고기를 먹든 안 먹든 모두가 내는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여기다 국제 사회에서 ‘세계 최초의 개 식용 합법화 국가’라는 타이틀이 가져올 유무형의 손실과 전염병이 발생할 경우 수습 비용까지 계산하면 우리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불하게 된다.

나는 온라인에서 개식용과 관련된 논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개고기 합법화를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신뢰할 수도 없고 그 수요마저 줄고 있는 개고기를 합법화하느라 엄청난 혈세를 쏟아붓는 것이 ‘합리적’인 일일까? 무엇보다 이것이 ‘가치 있는’ 일일까?

“합법화해라. 아무도 손해보지 않는다. 개 식육업자들은 당당하게 영업해서 좋고, 개고기 먹는 사람들은 깨끗하고 안전하게 먹어서 좋다. ...”

누가 손해를 보는가? 우리 모두다. 모두가 손해 보는 일이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일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얻는 것이 더 많아서가 아니다. 혹자의 말처럼 얻는 것은 항상 명확한 반면 잃는 것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단순한 주장의 진짜 문제점은 여전히 손익의 대상을 인간으로 국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동물을 배제했던 비인간성이 현대 축산업을 참극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거나 완전히 잊고 있는 것이다. 개식용 합법화 주장이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오인되는 상황은 우리가 현대 축산업의 비극으로부터 아무 교훈도 배우지 못했음을, 우리의 기억상실을, 어리석음을 증명할 뿐이다.


🔖 모든 사람이 윤리적인 선택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무엇을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을지 결정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질문에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응답하는 데에는 아무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은 흔히 듣는 이야기다. 사회는 거대하고 복잡하고 수많은 이익집단이 얽히고설켜 있는 곳이다. 사실은 그렇다. 한 사람이 식탁에서 고기를 치워버린다고 공장식 축산이 사라지지도 않고, 한 사람이 모피를 사지 않는다고 모피 산업이 몰락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미코라는 한마리의 유기견을 구했을 때 연간 유기동물 발생 두수를 가리키는 8만이라는 수치는 내게 무력함 그 자체였다. 8만마리에서 내가 줄인 유기견의 숫자는 단 한마리였다. 미코를 구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코가 나에게, 내가 미코에게,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미코의 세상과 나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거기에는 도덕도, 윤리도, 모순도, 딜레마도, 어떤 복잡한 문제도 없었다. 낙관도 비관도 없었다. 나는 거기에서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자격 없는 자의 응답이다.